내 생의 멋진 날

♠ 서울의 도심에서 만나는 옛 공간
서울시 종로구 북촌 & 계동길 일대



어느 날 문득 북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바로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생각에 부랴부랴 북촌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왜 새삼스레 새해 첫날 아침에 북촌이 마음에 떠올랐을까.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가끔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유 없이 하는 행동이나 말이 얼마나 많은가.그저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가면 되는 것 아니겠나.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계동길로 향했다.오밀조밀 낮은 지붕 아래에 이어진 아기자기한 가게를 지나서 얼마 걷지 않아 북촌문화센터가 나타났다.열린 대문으로 조심스레 들어서자 분주했던 도시의 소음은 잦아들고 고즈넉한 한옥의 운치가 감돌았다.한 바퀴 휘둘러보고 다시 계동길을 걷자니 한옥의 한쪽 굴뚝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어린 시절 산골 마을에 저녁이 오면 마치 할머니의 흰 모시적삼 옷고름처럼 피어오르던 그 부드러운 곡선의 연기가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한옥으로 이루어진 게스트 하우스는 분명 이방 여행자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낯선 공간이었다.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갓을 쓴 선비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지나칠 것만 같았다.

가회동 골목길 깊숙이 걸어 들어가자 이제 도시의 메마른 시멘트 건물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온전한 한옥들이 층층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펼쳐졌다.가회박물관이 있는 가회동11번지 골목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도깨비처럼N서울타워가 삐죽 솟은 남산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저 멀리 도시 한가운데는 건설 현장의 타워 크레인이 마치 인간 문명을 집어삼키려는 로봇처럼 긴 팔을 휘저으며 새로운 빌딩을 짓고 있다.한옥의 처마 사이로 비치는 도시의 풍경은 뭔가 낯설고 어색했다.그에 반해 부드러운 곡선의 한옥이 만든 길과 골목에는 정겨운 그리움 같은 것이 있었다.시멘트 건물 속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이곳이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 마음이 쉬어 가는 자리, 그리고 은은한 향기

새해 첫날인데도 가회동의 한 찻집이 문을 열었다.조심스레 문을 밀고 들어가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연로한 할머니가 조용히 맞아 주었다.한옥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찻잔 속에 꽃향기'라는 글귀가 적힌 작은 식탁보 위에 붉은 화병이 놓여 있고,서쪽 창문으로는 새해 첫날의 햇살이 비껴들었다.쭈글쭈글 오그라들었던 국화꽃들이 찻주전자 속에서 활짝 피어났다.그러고는 그 옛날에 피웠던 향기를 찻잔 속에 그대로 쏟아 내어 한 모금만으로도 입안 가득 향기를 전해 주었다.

한옥마을은 한적하고 조용했다.간혹 새해 인사를 다니는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눈이 소담스럽게 쌓인 기와지붕이 그려 내는 가로,세로,사선의 선들은 무질서한 듯 조화로웠다.가회동 한옥 순례가 끝나고 삼청동에 인접한 언덕길에 서자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점점이 도시의 불빛이 켜지고,북악산 산자락은 부드러운 원호를 그리며 서울을 감싸 안았다.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건너가자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전통의 모습이 가득하던 공간에 모던한 카페와 가게가 자리 잡았다.화려한 조명을 밝힌 레스토랑에는 새해를 맞는 연인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예전에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그곳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가득한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북촌의 기와지붕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르크트 광장을 둘러싼 고딕 건축물을 보던 때의 감흥이 그대로 살아났다.무엇보다 광장 주변의 작은 골목길을 걷다가 예쁜 카페에 들러 잠시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소품 가게의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것은 북촌의 골목길을 걸으며 느끼는 소박한 기쁨과 무척 닮았다.과거의 유산이 현재 속에 공존할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한 시간이었다.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이 이리도 간단할 수 있음을 북촌 한옥마을의 소박한 길을 걸으며 몸으로 느꼈다.

♠ 북촌을 지키는 맛,그리고 새로움 더하기

5월에 다시 찾은 북촌은 새해 첫날처럼 하늘이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뭔가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생동감이 꿈틀거렸다.북촌문화센터에서 다양한 전통 문화 강좌가 열렸는데,나란히 무릎을 꿇은 두 외국인 청년이 강사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복조리를 만드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넓은 정자 마루에서는 한 노인이 한가롭게 가야금을 뜯었는데,분주하던 마음이 가야금 연주 속에서 절로 느긋해졌다.

두 번째로 온 곳이니만큼 이번에는 북촌의 숨어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를 찾기 위해 작은 골목으로 발길을 향했다.계동의 한적한 골목길 중간 다세대주택1층에 자리 잡은 작은 레스토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특별히 눈에 띄는 간판도 없고 연한 파랑색으로 칠해진 입구에는 작은 사다리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내부의 소품이나 조명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멋스러움이 느껴졌다.안쪽의 작은 계단을 올라가자 다세대주택 뒤쪽의 좁고 가느다란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좁은 공간이지만 테이블을 억지로 채워 넣기보다는 공간을 여유롭게 두어서 마음이 편안했다.감베로니와 레드와인을 한 잔 주문했다.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졌지만 오히려 운치가 느껴졌다.향긋한 와인은 입맛을 돋우었고 감베로니는 맛깔스러웠다.자칫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한옥마을 북촌의 한적한 골목에는 새로운 맛과 멋을 지닌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 북촌이라 더욱 즐거운 우중산보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우중산보를 멈출 수 없었다.계동길을 따라,가회동길을 따라 산보는 계속되었고,나와 같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북촌의 매력에 한껏 빠져든 사람들의 행렬도 이어졌다.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고,할 수 없이 산보를 잠시 멈추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쉬어 갈 심산으로 주변을 살폈다.계동길 중간 즈음에 채 두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의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쉬어 가는 의자를 내놓은 주인장의 인심이 정겨웠다.카페 밖에는'계동길의 따스한 정을 닮으려 한다.'는 주인장의 진심 어린 고백을 적어 놓았다.

계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감 어린 가게들이 눈에 많이 띈다.우연히 발길이 닿은 한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테이블에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자리에 앉아 가만히 살펴보니 테이블은 사실 아직도 문고리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옛날 대문 문짝이었다.수국차인 산들바람차를 한 모금 들이켜자 향기로운 수국이 입안을 맴돌다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갔다.시선이 머무는 작은 공간마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중요한 건 존재이지 이름은 아니지만 존재가 중요하게 되면 그 이름도 의미를 갖게 된다.김춘수의'꽃'처럼.북촌이 그러했다.새해 첫날 이유도 모르고 찾았던 이 공간이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소중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변했다.새해 첫날 어스름 속에 느꼈던 그 적적했던 심사는 이제는 가슴속 따스한 추억이 되었다.잠시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그 공간을 걷고,언제든 들르면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하릴없이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존재하는 곳,그곳이 바로 북촌이다.

<여행 정보>

#도착하기

- 대중교통
➊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린다.가고 싶은 코스에 따라 나오는 출구 번호가 다른데 보통2번 출구에서 나와 직진하면 관광안내소가 보이므로 지도를 받아 자신의 관심 있는 곳을 표시한 뒤 코스를 정해 돌아 보자.
➋ 버스: 7025, 109, 151, 162, 171, 172, 272, 601번 버스 이용 
➌ 공항버스: 602-1번 이용

#따라가기

북촌은 한옥,전통 공방을 포함해 다양한 공방,예쁜 까페,맛집,역사적 장소 등이 섞여서 계동,재동,삼청동,팔판동 일대에 걸쳐 넓게 펼쳐진다.언덕도 오르내려야 하므로 한 번에 모든 곳을 다 보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소박한 풍경이나 공방 체험을 원한다면3번 출구 쪽 동네를,화려한 곳을 원한다면2번 출구의 왼쪽으로 나오는 삼청동 쪽을 가 보자.가회동11번지와31번지에서 바라보는 기와지붕과 서울 도심의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전통미를 선사해 준다.

#먹어 보기

계동 현대사옥 근처에 있는 식당'안집'은 세련되지는 않지만 맛깔난 토종 음식이 한 상 가득 나오는 한정식이 맛있다.가회동 동사무소 뒤편에 자리한'두루미키친'은 간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건강음식이 가득하다.대로변에서 살짝 벗어나 동네 골목에 있는'후스 테이블'에서는 파스타(돈미약국 근처에2호점이 생겼으나1호점의 분위기가 더 정감이 있다.)를 맛보고, '대장장이 피자'의 화덕 피자, '차우기'의 젓가락으로 먹는 개성 있는 서양 음식 등이 발길을 붙잡는다.근처에 있는 다양한 카페에서 자신만의 맛을 자랑하는 커피와 차,케이크을 먹을 수 있으므로 어느 곳이나 들어가 보자.

Posted by 친구1004